[3] 한국천주교 초석을 놓은 성지들
1. 손골성지 -초기 외국선교사 입국 후 적응장소 및 선교거점이된 교우촌 손골성지
◦손골 교우촌의 형성
- 기해박해 이전에 이미 서울 가까이에 몇몇 교우촌이 형성
- 손골에도 이즈음 교우촌이 생긴 것이 아닌가 추정. 병인박해 이전에 이미 손골 교우촌은 안정적
- 1831년 조선대리감목구가 설정되고 파리외방전교회 선교사들이 들어와 서울근교에 교우촌 형성
- 서울 중심으로 사목을 하게 되자 신부들 가까이 있어야 성사나 미사에 참여가 용이 (손골성지 주소=경기 용인시 수지구 동천로437번길 67)
◦박해시기 손골 교우촌의 규모
- 병인박해 때 손골에서 체포되어 새남터에서 순교한 도리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 도리 신부가 손골에 체류할 당시 손골에는 신자들만 살고 있었고 모두 12가구
- 박해가 끝난 다음 1900년 하우현에 본당이 생겼을 때 그 공소로 편입된 손골 교우촌의 신자가 47명
- 손골에는 적어도 45-50명 정도의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살면서 신앙생활을 이어갔던 것 같다.
- 도리 신부의 편지에 따르면, ‘손골의 교우들은 주로 담배 농사를 하며 근근이 생계를 꾸려갔고,
- 논이 조금 있었으나 홍수로 폐허가 되어 먹을 것조차 구하기 어려운 생활을 하며 살았다’라고 한다.
◦손골 교우촌의 중요성
- 박해시대 서양 선교사들이 입국하면 안전한 곳에서 삶에 적응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 선교사들이 신자들을 사목하기 위해서는 우선 새로운 언어와 풍습을 익혀야 했고
- 조선에서 선교사들이 안전하게 머물면서 준비를 하기 위해 신자들만 모여 사는 적합한 교우촌 필요
- 교우촌을 선정하는 데 있어서 무엇보다도 그곳에 사는 신자들이 열심하고 믿을 수 있어야 했다.
- 손골 교우촌은 이런 의미에서 다른 어떤 교우촌보다 선교사들의 신뢰를 받았던 것 같다.
- 박해시기인 1857년부터 1866년까지 5명의 선교사가 손골에 묵으면서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적응
- 타지역 활동하던 선교사들도 사목하는 것을 잠시 쉬는 여름철 농번기에는 손골을 찾아와 피정
- 이것은 그만큼 손골 교우촌의 신자들이 신앙적으로 견고하고 믿을 수 있었다는 것을 의미
◦손골 교우촌과 선교사들
- 다블뤼 신부가 1853년 9월 18일 부모에게 보낸 편지의 발신지가 손골이었다.
- 다블뤼 신부 신학생 교육 모아 라틴어를 가르쳤다.
- 손골이 본격적으로 선교사들에게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는 장소가 된 것은 1857년이다.
- 1854년 제4대 조선 대목구장 베르뇌주교는 페롱신부가 1857년 3월 입국하자 그를 손골로 보냈다.
- 이렇게 맨 처음 손골 교우촌에 거주하면서 조선어를 익힌 선교사는 페롱 신부였다.
- 페롱 신부가 손골에 있었던 1857년 최양업 신부는 손골로 페롱 신부를 찾아와 함께 지내다 갔다.
- 1861년 서울 베르뇌주교는 입국한 선교사 4명 중 조안노신부와 칼레신부를 손골로 배치
- 1863년 6월 23일 입국한 오메트르 신부는 1863년 손골에 와 1864년 10월 말까지 있었다.
- 손골에 마지막으로 온 선교사는 도리 신부이다.
- 도리 신부는 손골에서 열심히 언어와 풍습을 익히던 중
- 병인박해 맞게 되어 1866년 손골에서 체포되었고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손골 교우촌은 선교 거점
- 손골은 처음 입국한 선교사들 언어와 풍습을 익히는 장소와 신자 사목, 선교의 중요한 장소.
- 손골 교우촌이 박해시대 신자 사목의 중요한 축이었기 때문
- 베르뇌 주교는 오메트르 신부에게 “손골과 가까운 고을” 네 곳을 사목하라고 인사발령을 했다.
- 오메트르 신부는 인근의 묘루니 교우촌이나 신봉리 교우촌 등 아주 가까운 곳의 신자들을 사목했다.
- 손골을 중심으로 가까운 곳을 사목하다가 자리를 옮겨 미리내를 중심으로 사목,
- 또다시 다른 지역으로 옮겨 그곳을 중심으로 신자들을 찾아보며 사목과 전교를 했다.
◦선교사들의 손골에서의 생활
- 이군옥(李君玉, 요셉)의 가족들이 손골에 온 선교사들은 모두 같은 집에 머물렀다.
- 페롱, 조안노, 칼레, 오메트르, 도리 신부가 모두 시차를 두고 한 집에 머물렀다.
- 이군옥은 단순히 선교사들의 뒷바라지만 한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조선어를 가르쳐주는 스승 역할
- 도리 신부는 자신도 이군옥에게 조선어를 배웠는데, 이군옥이 매우 용감한 사람이라고 했다.
- 손골교우 이군옥은 손골교우들은 물론 선교사들에게 큰신뢰를 받아 계속해서 선교사들의 뒷바라지
- 손골에서 생활하는 선교사들에게 미사를 봉헌할 수 있는 공간은 그들의 방이 곧 경당이었다.
- 그방에 널빤지로 제대를 만들어 흙벽에 고정. 선교사들과 신자들은 매일 이곳에서 함께 미사를 봉헌
- 이들 선교사들은 찾아가기도, 찾아오기도 하며 함께 노래를 부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도 하며,
- 침묵을 지키고 단식을 하며 함께 피정을 하기도 했다.
◦손골 교우촌의 순교자들
- 손골 교우촌과 관계있는 순교자로는 우선 도리 신부와 오메트르 신부.
- 도리 신부는 1866년 2월 27일 오후 1시경 체포되어 3월 7일 서울 새남터에서 순교했다.
- 오메트르 신부는 1866년 3월 11일 체포되어 3월 30일 보령 갈매못에서 순교했다.
- 두 순교자 모두 103위 성인 명단에 포함되어 있다.
- 두 성인 신부들 외에도 손골 교우촌에서 선교사들의 지도를 받았던 신자 중에도 순교한 이들로
- 할아버지 요한과 아들 베드로, 손자 프란치스코는 1871년 3월 19일(음) 좌포청에서 다 함께 순교
◦순례지가 된 손골
- 손골은 한국에서가 아니라 도리 신부의 고향에서 주도해 순례지가 되었다.
- 도리 신부는 프랑스 생 틸래드 드 딸몽 본당 출신이다.
- 죠셉 그를레(Joseph Grelet) 신부가 1956년부터 1966년까지 이 본당의 주임으로 있었는데
- 병인박해 순교자들의 순교 100주년이 되는 해에 교황청 시성성(諡聖省)을 통해 시복 청원
- 그를레 신부는 한국을 방문 손골을 순례하고 손골과 도리 신부 고향 딸몽을 연결
- 프랑스로 돌아간 그를레 신부는 1964년 “조선, 순교자들의 땅”이라는 책을 저술했다.
- 그를레 신부는 도리 신부의 부친이 사용하던 맷돌에서 똑같이 생긴 십자가를 두 개 만들었다.
- 하나는 도리 신부 고향에 하나는 손골에 도리 신부의 순교를 기념하는 비(碑)를 세웠다.
- 이렇게 현양비를 만들면서 손골 순례가 시작
- 2016년 10월 도리 신부 고향교구 뤼송 교구장 카스테 주교 손골 방문
◦손골 성지 순교자들의 방에 모신 순교자 유해
- 순교자들의 방에는 4분 성인과 손골 무명 순교자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 다블뤼 주교 유해, 오메트르 신부 유해, 도리 신부 유해, 김대건 신부 유해. 손골 무명 순교자 유해
◦손골 무명 순교자 묘
- 병인박해 때 박해를 피해 손골에 숨어든 신자 4분이 체포, 끌려가던 중 신봉동 개울가에서 처형
- 당시에는 ‘선참후계(先斬後啓, 먼저 참하고 나중에 보고하라)’는 명령이 있어 가능했던 일
- 길가에 버려진 순교자들의 시신을 개울가 작은 언덕에 구덩이를 파고 돌로 덮어 ‘돌무덤’을 만듦
- 이곳의 옛 이름이 서봉(시봉)이고 순교자들의 이름과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 ‘서봉부락 무명 순교자 돌무덤’이라고 불리며 전해내려 왔다.
- 신봉동(新鳳洞)은 1914년 신리(新里)와 서봉리(棲鳳里)이 합쳐져서 신봉리가 되었다가 지금은 신봉동 9
- 4위 무명 순교자들을 지하석실에 하나의 광중(壙中)에 합장
2. 마재성지 -초기 신앙의 태동지 마재 성가정 성지
◦신앙의 태동지 마재의 인물들
- 정약용 4형제(정약현, 정약전, 정약종, 정약용)가 태어난 한국 천주교회의 요람이자 성가정의 모범
- 의정부교구 이기헌 주교 2017년 5월 27일 마재를 성가정 성지로 선포
- 정약종 아우구수티노, 2014년 8월 16일 서울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
- 정하상 바오로,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성인품.
- 정씨형제는 초기천주교 창설자들과 깊은 인연
- ⓵ 정약현의 부인이 이벽 성조의 누이
- ⓶ 정약용의 누이가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의 부인,
- ⓷ 정약현의 사위가 황사영
◦한국천주교 초기의 실학자 마재의 인물 정약용 요한
- 1784년에 수표교에 있던 이벽의 집에서 세례받음, 이승훈 (李承薰)의 처남
- 신유박해로 유배, 유배지에서 학문연구에 전력하여 실학사상을 집대성
- 1818년 유배지에서 돌아온 이후 자신의 배교를 크게 반성하고 자주 대재(=단식재)를 지킴
- 고신극기(古身克己)의 생활을 하면서 외부와의 연락을 단절하고 묵상과 기도로 살아갔음
- ≪조선복음전래사≫(朝鮮福音傳來史)를 저술
- 1836년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종부성사를 받고 선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