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산교구
연혁
1827년 2월에 전남 곡성에서 시작된 정해박해는 천주교를 황폐화시켰다. 전라도 지방의 신자들은 경남 서부 지방으로 넘어 오기 시작했다. 이 지역은 지리산과 덕유산에 가로막혀 사람들의 왕래마저 흔하지 않던 지역이라 신자들이 숨어 들어와도 전혀 거들떠보지를 않았기 때문이다. 정해년의 모진 추위와 여름 가뭄으로 덕유산 일대에서 화전을 하며 숨어 있던 신자들은 그 해 겨울 많이도 얼어죽고 굶어 죽었다. 그래서 따뜻한 봄이 되자 교우들은 민가를 찾아 흩어지기 시작하여 남쪽(마산, 부산 지역)으로 피난을 하게 되었다.
1860년경에는 전국에 153개의 교우촌이 있었고 마산 지역에는 8개의 교우촌이 있었다. 1861년 리델(Felixclair Ridel) 신부가 입국하여 최양업 신부 후임으로 경상도 지방 포교를 담당하였고 1869년에 제 6대 조선 교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교우촌도 병인박해(1866년), 무진박해(1868년) 때에 거의 사라지게 된다. 그 이후 경상도 지방에 다시 로베르(Achilloe Rovert) 신부에 의해 포교 활동이 시작되는데 그는 1877년 24살의 젊은 나이로 조선에 입국하여 산간 벽지로 숨어 다니며 헌신적으로 포교 활동을 한다. 그는 1886년 왜관 산나무골에 부임하여 경상도 여러 공소를 관장하기도 하고 특히 1887년에는 거제도 옥포 공소까지 가서 순교자 윤봉문의 처가 식구에게 세례성사를 베풀기도 하였다.
1897년 6월 9일 강성삼 노렌죠 신부가 보좌 신부 격으로 마산교구 최초의 성당인 명례성당에 부임하게 된다. 강신부는 1897년 4월 26일 서울에서 뮈델 주교로부터 서품을 받았으며 김대건 신부, 최양업 신부에 이은 우리나라 세 번째 사제였다. 밀양의 명례공소 교우들은 120냥의 돈을 주고 세 칸 짜리 집을 사제관으로 미리 사게되는데 이렇게 해서 임시 본당은 명례로 정해지고 강신부는 발령을 받고 부임하게 된다. 강신부를 맞이하여 명례 본당은 활기를 띄게 되나 병약했던 강신부가 부임한지 6년만인 1903년 9월 19일 38세를 일기로 명례에서 선종을 하게 된다. 그러자 명례 본당은 1916년에 성당 건물을 지어 명례 천주 당이라는 이름으로 교구의 인가를 받았다.
경남지역의 공소가 광활해지자 새로운 본당의 필요성을 느끼게 되는데 처음 본당을 세우고자 했던 곳이 진주였다. 그래서 신자들은 1898년 7월 21일자로 주교님께 탄원서를 내어 신부 한 분을 보내 주길 빌며 신부 영입 운동을 펼쳤는데, 이를 알게된 부산 본당의 따께(Emile Taquet) 신부는 진주 본당의 신설을 역설하면서 자신이 진주에 갈 것을 자원하게 된다. 이렇게 해서 1899년 6월 성신강림축일 전날 교우들의 환영을 받으며 진주에 부임한 따께 신부는 교우들이 장만한 집 이웃에 3백냥을 주고 또 다른 집을 매입하여 옛 집은 성당으로 새 집은 사제관으로 개조하여 거주하게 된다. 우선 그가 부임하자 교우들과 주민들은 매우 환영하였다. 특히 주민들은 서양인이 오니까 관의 횡포를 막아줄 것이란 기대감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지방의 망나니들과 아전들은 노골적으로 반대하며 신부를 괴롭혔다. 이런 여러 이유로 따께 신부는 본당 이전을 결심하고 후보지 물색에 나섰다. 처음에는 소촌공소(지금의 문산본당)를 생각했지만 결국 마산으로 본당을 옮기게 된다. 부임한 지 1년만에 여러 사정으로 마산으로 본당을 옮기게 된다. 그리하여 마산에 완월동 성당(1900년)이 설립되고, 진주의 소곡공소는 1905년 문산성당이 되었다.
대구교구 관할이던 마산 지산 산역은 부산교구에 소속되어 있던 중 1966년 2월 15일 교황 바오로 6세는 마산교구를 분리 설정하여 인준하심에 따라 교구로 승격되었다. 현재 마산교구의 본당은 준본당 1곳을 포함하여 모두 74개이다. 2025년에 제 6대 교구장 이성효 리노 주교가 임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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